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틀로프 프레게 (문단 편집) == 주목 받지 못했던 생애[* <프레게 현대 분석철학의 창시자에 대한 소개>, 안토니 케니 지음, 최원배 옮김, 서광사, pp. 15-27.] == 프레게의 생애는 아래에서 언급할 내용들을 제외하면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데 프레게의 양자인 알프레트[* 프레게의 자녀들은 어린 나이에 모두 사망하였고 결국 양자를 들여 가계를 이어나갔다. 학문에서나 개인적 삶에서나 불행의 연속이었던 셈.]가 쓴 프레게의 전기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손실되었기 때문이다. 1848년 [[독일 연방]]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루터회]] 집안에서 태어난 프레게는 21살에 예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4학기를 다닌 후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5학기 동안 물리학과 철학, 수학을 공부하였다. 1873년에 기하학을 주제로 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예나대학으로 돌아와 1874년 강사생활을 시작으로 은퇴할 때까지 45년 동안 모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1879년 첫번째 저서인 <개념표기법>이 출판되지만 학계에서는 별다른 호평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표기법> 덕분에 프레게는 같은 해에 강사에서 교수로 승진하였고 이후 5년 동안 그가 내놓은 출판물들은 <표기법>에 대한 비판에 대응에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1884년 <표기법>에 대한 비판들을 반박하고 수학의 기초에 대한 프레게의 입장이 담긴 <산수의 기초>가 출판된다. 프레게는 이 책에서 '''논리주의'''로 알려진, '''산수는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시하게 된다. 하지만 <산수의 기초>는 <표기법>과는 달리 비판은 커녕 관심조차 제대로 끌지 못했다. 서평이라고는 3편이 다였고 그나마 전부 비판일색이었으며 거의 20년 동안 학계는 프레게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여 1892년 그의 가장 중요한 논문 중 하나로 평가 받는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를 발표하였다.[* 대부분의 서양철학사가들은 <뜻과 지시체>가 발표된 1892년에 분석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본다.] 1893년 프레게는 그 동안 연구해 온 성과물들을 정리하여 <산수의 근본법칙> 1권을 출판하는데 이전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근본법칙> 또한 학계의 호응을 얻지 못해서 2권은 10여년이 지나서야 출판하게 된다. 하지만 <표기법>를 출판했을 때처럼 <근본법칙>의 출판으로 프레게는 상급 교수로 승진했을 뿐만 아니라 광학 렌즈 제조로 유명한 기업인 [[자이스]]가 설립한 재단에서 연구비까지 받게 된다. <근본법칙> 덕분에 프레게는 안정적인 지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맺게 된다. 이탈리아의 수학자 주세페 페아노는 <근본법칙>을 읽고나서 프레게와의 논의를 통해 자신이 진행하던 [[자연수#s-2.1|산수의 공리화]] 작업을 수정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페아노는 1900년에 참석한 [[파리(프랑스)|파리]] 국제철학자대회에서 자신의 저술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젊은 영국인 수학자에게 프레게를 소개해주는데 그 영국인 수학자가 바로 [[버트런드 러셀]]이었다. 1902년 <근본법칙>의 2권이 막 인쇄 중인 상황에서 프레게는 케임브리지에서 연구하고 있던 러셀로부터 <근본법칙>에서 제시된 6개의 공리들 중 [[러셀의 역설|다섯번째 공리에서 모순이 도출된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게 된다. 러셀의 편지를 받고 나서 크게 낙담한 프레게는 5번째 공리를 수정하였으나 <근본법칙>의 체계에서는 여전히 모순이 도출된다는게 밝혀졌다. 결국 프레게는 논리주의에 대한 믿음을 버렸지만 러셀은 수학이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한다.[* 프레게는 기하학이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반면 러셀은 기하학까지도 논리학으로 환원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도 [[불완전성 정리 #s-4.3| 실패로 돌아간다.]]] 1911년 수학의 기초에 관심이 많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한 공학도가 프레게를 찾아와 배움을 청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지쳐있던 프레게는 젊은 공학도에게 케임브리지의 러셀을 찾아가 배울 것을 권했고 프레게의 조언을 받아들인 그는 케임브리지로 편입하여 러셀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 공학도의 이름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었다. 그후 프레게는 1918년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논리학에 관한 글들을 쓰다가 1925년 1월 양자 알프레트에게 유언을 남기며 다음과 같은 메모와 미발표 논문들을 함께 맡겼다. >사랑하는 알프레트, 내가 쓴 것들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비록 이것들 전부가 황금인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황금이 들어 있다. 나는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될 것들이 여기에 들어 있다고 믿는다.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라. 너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이것이 내가 너에게 물려주는 것들의 큰 부분이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자신이 [[분석철학|서양철학의 역사를 바꿔 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프레게의 죽음은 그의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학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